만남은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서울에서 온 기자라며 명함을 내미는 우리를, 그녀는 동그래진 눈으로 한참 쳐다봤습니다. 놀람과 경계심이 섞여 있는 눈빛. 그래도 내쫓지 않고 대화를 허락해준 것만 해도 참 다행입니다.
이른 아침 출근시간에 불쑥 찾아간 게 미안해서, 제 차로 그녀를 태워주겠다고 했습니다. 채비를 마저 하고 나오겠다고 집으로 들어갔던 그녀가 손에 흰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나왔습니다.
10분쯤 달렸을까요. 농공단지 안에 있는 한 공장 앞에 차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인사를 나누고 공장으로 향하는 그녀의 손이 좀 허전합니다. 아까 챙겨온 비닐봉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녀가 앉았던 자동차 조수석 아래를 보니, 비닐봉지가 숨바꼭질 하듯 남아 있습니다.
공장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녀의 자그마한 뒷모습과, 조수석 아래에 남겨진 비닐봉지를 번갈아 바라봅니다. 그녀가 비닐봉지와 함께 두고 간 ‘이야기’를 이제 여러분께 해드리겠습니다.

그림 속에 두 남자가 있습니다. 1948년생 동갑내기. 둘은 40여 년 전 군대에서 만났습니다. 앞서 걷는 남자는 뒤에 있는 남자를 ‘대장’이라 불렀습니다. 군대에선 자신이 선임이었지만, 사회에서 다시 만났을 땐 후임을 대장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뒤에 선 남자는, 자신을 대장이라 부르는 이 충성스런 남자를 ‘이 새X’라 불렀습니다.

‘대장’이라 불린 남자 김승태(가명)는 수도권에 집과 땅을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부인은 서울에서 대형 약국을 운영하며 풍족하게 살았습니다. 주말이면 경기 이천시에 있는 전원주택과 농장에서 승마를 즐기고 여가를 보냈습니다.
그를 ‘대장’이라 부른 남자 정순일(가명)은 그의 농장에서 먹고 자고 일했습니다. 김승태가 취미로 타는 말을 돌보고, 말이 뛰어노는 초원과 텃밭을 가꾸고, 나무를 관리했습니다. 매일 새벽 5시 말똥 치우기로 일과를 시작해, 해가 지도록 농장의 온갖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정순일의 몸은 너무 작고 말랐습니다. 허리도 굽고 머리카락도 백발이었고, 특히 이가 다 빠져버리고 거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60대 나이에 이미 80대 노인으로 보일 정도였죠.
20년은 늙어 보이는 정순일과 반대로, 김승태는 20년은 젊어 보였습니다. 옷차림도 세련됐는데, 외모로만 보면 두 사람은 친구 사이가 아니라 꼭 부자지간으로 보였답니다.
농장주 김승태는 이웃에 나란히 사는 A와 아주 앙숙이었습니다. 갈등은 김승태와 A 사이에서 시작됐지만, 엉뚱하게도 머리가 터지게 맞고 감옥살이까지 한 건 정순일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대장’ 김승태를 지키는 군사라도 되는 듯이, 이웃 A와 몸싸움까지 벌였습니다. A는 그보다 열 살 이상 젊었습니다. 정순일은 곡괭이 자루로 맞아서 머리와 눈두덩이가 찢어지고, 손도 물어뜯겼습니다. 20일이나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몇 달 뒤. 또 다시 A 부부와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정순일이 욕하는 걸 A가 스마트폰으로 촬영해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법적으로 자신을 방어하지 못한 정순일은 재판에 넘겨졌고, 4개월간 감옥살이까지 하고 나오게 됩니다.
정순일의 마음에 억울함이 쌓일 대로 쌓였습니다. 농장에서 쇠스랑을 들고 일을 하고 있던 어느 날, A와 또 시비가 붙었습니다. 정순일이 악에 받쳐 말했습니다.
“너 때문에 감방에서 살고 나왔다, 개새X야!”
“오냐, 내가 너 또 감방에 보내줄게!”
A는 쇠스랑을 든 정순일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또 신고를 했습니다. 정순일은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국선변호인은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습니다.
재판 결과는, 무죄였습니다. 배심원 만장일치. 사진 속 쇠스랑은 협박을 위해 든 게 아니라 밭에서 일하는 중이어서 들었던 거라는 게 재판 과정에서 소명된 덕분입니다.

그런데, 재판을 준비하던 변호인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게 있었습니다. ‘피의자신문조서’에 남아 있던 정순일의 말.
“친구와 함께 산 지 10여 년 되었고 고용관계가 아니라 함께 살면서 소일거리를 하는 것이라서 급여는 받지 않습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골병이 들도록’ 농장일을 하는 정순일이 기초생활수급 대상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수입이 없기 때문에. ‘대장’이 월급을 주지 않기 때문에.
정순일은 자신이 기초생활수급비로 얼마를 받고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수급비가 들어오는 통장과 도장도 ‘대장’이 관리했으니까요.
변호인의 머릿속에, 재판 도중 스쳐간 한 장면도 떠올랐습니다. A가 스마트폰으로 찍은 영상. 영상 중간쯤, 신발도 신지 않은 정순일에게 누군가 욕을 하며 머리를 때리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 사람은 앙숙인 이웃 A가 아니라 ‘대장’ 김승태였습니다.
재판이 끝나고 얼마쯤 지났을까. 어느 날 정순일은 변호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대장이 나를 농장노예로 부린다고 누군가 신고해서 (대장이) 경찰서에 가게 생겼어요! 10년 치 월급 떼먹고 저를 학대했다고 누가 신고했대요. 변호사님, 우리 대장 좀 도와주세요.”
변호인은 정순일의 부탁을 거절했습니다. 후일 변호인은 두 남자의 이야기를 글로 썼습니다. 지난 5월 진실탐사그룹 셜록 지면에 실린 <잊히지 않는 신발 한 켤레… ‘농장노예’의 부탁>이란 글입니다. 그 변호인이 바로 ‘몬스테라’ 작가입니다.

정순일이 무죄 판결을 받은 게 2016년입니다.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대장’이라 불린 남자와 ‘노예’라 불린 남자의 운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저는 정순일부터 찾아 나섰습니다.
지금은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겠죠. 9년 전에도 건강 상태가 나빴던 그는 더 늙고 더 병들고 더 약해지고, 결정적으로 더 이상 농장일을 할 수 없게 됐을지 모릅니다. 그의 대장은 그가 편안한 노후를 보내게 해줬을까요.
정순일이 김승태의 농장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중반쯤으로 짐작됩니다. 정순일이 부인과 함께 살던 시절도 있습니다. 중동에서 건설 노동자로 일해 목돈을 벌어 돌아온 그. 하지만 부인은 그를 떠났습니다. 정식으로 이혼 도장을 찍은 건 아니지만, 소식도 모르는 채 남남으로 살게 됐습니다.
빈털터리로 혼자 남은 그는 남동생과 같이 살았지만, 남동생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다시 여동생의 집으로 옮겨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생활조차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대장’의 농장으로 오게 된 겁니다.
수소문 끝에 여동생의 집으로 짐작되는 주소를 알아냈습니다. 지난 5월의 어느 날, 충북 음성군으로 새벽같이 출발했습니다.
조용한 농촌 마을의 작은 농가 앞에 도착했습니다. 대문 앞에 걸린 문패. “정순옥(가명)”. 정순일과 두 글자가 같습니다.

“누구 찾아오셨어요?”
등 뒤에서 들리는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 마을 이장이었습니다. 사정을 설명하니 “글쎄, 그런 사람이 저 집에 살았나…?” 하며 정순옥에게 전화를 겁니다. 통화 소리가 작게 들립니다.
“여보세요? 저 이장이에요. 저기 뭐야, 정순일 씨란 사람 알아요?”
“예. 우리 큰오빠요.”
찾았습니다.
얼마 뒤 한 여성이 집에서 걸어 나옵니다. 사진 속 정순일의 얼굴과 꼭 닮은, 작은 체구에 굽어가는 등까지 닮아버린 그의 여동생입니다.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어야겠습니다. 그는 지금 어디 있나요.
“…돌아갔어. 교통사고 나서.”

아. 저도 모르게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습니다. 사실 아주 뜻밖의 답은 아니었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전국 무연고 사망자 명단에서 정순일의 이름을 찾아보기도 했었으니까요.
여동생 정순옥의 나이도 벌써 일흔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정순일이 세상을 떠난 연도는 바로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몇 년 전이라고만 대답할 뿐.
“우리 오빠가 너무 착해. 착해 터져서 일만 죽도록 하고. 김 사장(김승태) 집에서, 거기서 일을 좀 많이 했지. 그런데 김 사장이….”
정순옥이 갑자기 말을 삼킵니다.
“쓸데없는 얘기…. (오빠는) 돌아갔는데 뭐 인자서(이제 와서)….”
정순일은 김승태의 농장에서 사는 동안에도 이따금 여동생 집에 들렀습니다. 자기가 농사지은 거라며 참깨 한 말을 지고 온 적은 있었어도, 주로는 돌아갈 차비도 없이 온 적이 많았답니다. 술을 마시고 여동생 “속을 썩이면서” 지내다, 차비를 얻어서 돌아가곤 했답니다.
저는 그동안 혹시 정순일에게 지적장애가 있진 않았을까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노예’라 불린 많은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정순옥은 스치듯, 이런 말도 했습니다.
“오빠가 정신이 조금…. 안 그랬었는데….”
정순옥은 오빠의 생활에 대해 아는 듯 모르는 듯 애매한 뉘앙스를 남겼습니다.
“(오빠가) 공짜로 많이 일을 했어. 그래도 (김 사장이) 먹여주고 재워주고 고마워 가지고 나도 배신을 안 하지. 그 사람 걸고 넘어지면 안 되는 거고….”
정순옥은 공장 식당에서 30년 가까이 일하고 있습니다. 출근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그녀를 계속 붙잡아둘 순 없었죠.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요.

이제 ‘대장’에 대해 알아볼 차례입니다. 농장주 김승태는 처벌을 받았을까요.
결론만 말하자면, 김승태가 재판에 넘겨졌다는 기록은 없었습니다. 재판에 넘겨진 적도 없으니 법적 처벌을 받지도 않았겠죠. 이유를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2014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이른바 ‘염전노예’ 사건. 당시 염전주 처벌 문제에 있어서도 논란이 많았습니다. 피해자가 가해자 처벌을 원치 않는 ‘처벌불원’ 의사를 밝히는 경우가 흔하게 있었죠. 정순일이 그랬던 것처럼.
“(처벌불원의 의사표시는) 처벌불원의 목적과 취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 그러나 처벌불원서의 효력유무를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수사 단계에서 반영해 근로기준법 위반에 대해 불기소처분(공소권없음)이 내려진 사례도 다수 발견되고 있고”(<장애인 범죄피해실태와 대책에 관한 연구> 한국형사정책연구원, 2018년)
재판에 넘겨져도 판결은 관대했습니다. 재판에 넘겨진 염전노예 사건 20건 중, 가해자에게 실형이 내려진 건 6건에 불과했습니다(2015년 기준). 살인미수, 폭행, 상해, 중감금 등 중대한 범죄가 발각된 경우 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집행유예가 선고됐습니다.
“더욱이 지역의 관행이었다거나 숙식을 제공하였다는 이유를 유리한 양형사유로 삼아 그러한 관행을 관용한 것은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헌법 전문)하는’ 우리 헌법 정신과도 배치된다.”(<염전노예사건의 반인권성에 대한 고찰과 국가의 과제에 관한 연구> 김강원, 2015년)

몇 주 뒤, 정순옥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오빠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었습니다.
“그날 아침에 경찰이 연락했어요. (오빠가) 밤에 (이천시) 장호원에서 사고 나셨다고. 자전거 타고 가시다가요. 충주에 있는 병원으로 싣고 갔다더니, 하루 만에 그냥 돌아가셨어. 장례 치르는데, 올케(정순일의 부인)가 그동안 연락이 없다가… 와서 올케가 보험금(합의금) 타갔지. (오빠는) 화장해가지고 아버지 산소 앞에 뿌렸어.”
정순옥의 태도가 조금은 바뀐 느낌입니다. 특히 ‘김 사장’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랬습니다.
정순옥 : “(김 사장) 싸가지 없는 거 알지. (오빠가) 공짜로 일해준 거 알아, 나도.”
나 : “정순일 어르신 돌아가시고 나서, 김 사장이 수급비 통장 안 주던가요?”
정순옥 : “아무것도 안 줬죠, 뭐. 못됐어. 알어, 나도. 냅둬요.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래). 이제 다 지나간 거, 뭐하러 떠들어….”
첫 만남 때처럼, 정순옥은 오빠 이야기보다 아들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 했습니다. 아들은 그 어렵다는 공무원이 돼서 결혼까지 앞두고 있다 하더군요. 아들 이야기를 할 때만 웃음소리가 섞여 나오고, 오빠에 대한 질문을 더 던져봐도 “인자서(이제 와서) 뭐해”라는 말만 돌아올 뿐이었습니다. 기억이 안 난다기보다,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라 이해했습니다.
통화는 10분도 안 돼 끝났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인삿말.
“먼젓번에 (공장까지) 태워다줘서 고맙구먼. 지나가다 들르셔. 김치 많이 담가놨어요.”
제가 그녀를 찾아간 날. 그녀가 차에 두고 내린 ‘비닐봉지’ 안에는 손수 담근 김치 한 통이 들어 있었습니다.

‘대장’이라 불린 남자는 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노예’라 불린 남자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마지막을 기억하는 여동생은, 오빠의 죽음에 대해 캐묻는 낯선 사람에게 김치 한 통을 선물했습니다. “여기까지 찾아와준” 게 고마워서.
서글픔과 노여움, 애달픔과 고마움. 그녀의 김치에는 세상의 온갖 맛이 다 들어 있었습니다.
취재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사진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