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지난달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마포구 흉기피습 사건’ 유족의 고통을 보도했습니다. 지난 8월, 박준원(가명, 32)은 20년 지기를 만나러 저녁 식사자리에 나갔다가 살해당했습니다.
유족들이 정신 없이 장례를 준비하고 있던 사이, 또 다른 고통이 덮쳐왔습니다. 준원이 흉기를 든 가해자를 피해 도망치는 CCTV 영상이 보도된 것입니다. 유족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고통에 한 번, 언론의 무차별적인 영상 유포에 두 번 상처 받았습니다. 유족 이은지(가명, 34) 씨의 심경이 담긴 편지를 공개합니다.
저는 ‘마포구 흉기피습 사건’ 피해자 박준원(가명, 32)의 사실혼 배우자이자, 피해생존자인 이은지(가명, 34)입니다.
이 편지를 쓰기까지 수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제 배우자를 살려내 오기만 한다면 모두 용서하고, 가해자의 남은 삶도 축복해줄 수 있다는 말 밖에…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말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지난 두 달간 살이 6kg이나 빠졌습니다. 30kg대지만 숨을 쉬고 재판을 준비하는 것에는 지장이 없으니 괜찮습니다. 이대로 살이 계속 빠져서 점점 작아지다가 소멸하는 것도 저에게는 좋은 일입니다.
저는 매일 영정사진을 보며 준원이와 이야기합니다. 이틀에 한 번 준원의 꿈을 꿔요. 허공에 대고 준원에게 ‘내 곁에 있냐’고 묻습니다. 틈틈이 준원의 카카오톡으로 제게 메시지를 남깁니다. 그럴 때면 준원이 여전히 곁에 있는 것 같거든요.

하지만 준원을 더 이상 만날 수도, 만질 수도 없다는 사실이 벼락처럼 들이칠 때가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죽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검색해봅니다. 중요한 건 두 가지입니다. ‘확실하게 죽을 것’ 그리고 ‘남겨진 가족들이 죽은 나를 확인할 때 최대한 덜 고통스러울 수 있도록, 상하지 않은 얼굴과 몸으로 죽을 것’.
준원은 칼에 무차별적으로 찔려 죽었어요. 아버님은 시신을 확인한 뒤, 환각과 환청을 들으십니다.
“아버지는 내가 그렇게 죽었는데도 지금 밥이 넘어가고 잠이 와?”
준원이 그런 말을 할 애가 아닌데도, 아버님은 환청으로 스스로 괴롭히고 계세요. 죄책감과 고통에 매일 시달리고 계십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줄곧 지켜보고 있으면서, 어떻게 저 두 가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준원을 살해한 A는 재판이 시작되자 ‘고의가 아니었다’며 ‘평생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겠다’, ‘준원이와 자기가 친구 사이였다는 걸 참작해달라’는 의견서를 제출했습니다.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말을 체감했습니다. A는 새벽배송으로 칼을 준비했고, 그날 꼭 보자며 약속을 잡았습니다. 첫 피격 이후, 도망치는 준원이를 180m나 쫓아가 죽였습니다. 그런데도 고의가 아니라니….(관련기사 : <범인의 칼에 가족을 잃고, ‘언론’의 칼에 삶을 잃었다>)
A의 가족은 준원의 장례가 끝나고, 9일 만에 가해자의 재산인 가해자 가게 매각부터 시도했습니다. 가해자와 그 가족들은 지인을 통해 사죄를 전할 수 있는 사이였지만, 연락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민사소송이 시작되자, ‘사과와 위로금’ 이야기를 하더군요.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살인사건 피해자의 유족이 되고, 현실은 끔찍함의 연속입니다. 애도할 틈도 없이 재판을 준비하고, 법정에 나가 가해자를 마주하며 유족의 고통을 ‘증명’해야 합니다. 준원이 직접 증언할 수 없으니까요. 살인사건 피해자는 증언할 권리조차 얻지 못한 채 눈을 감아야 합니다. ‘살인을 한 가해자’만이 스스로를 직접 변호할 수 있습니다.
저는 재판을 준비하면서 살인범이라도 터무니없는 형량을 받을 수 있다는 불안에 사로잡혔습니다. 심지어 가석방이 될 수 있다는 공포심과 분노 때문에 저와 준원의 가족들은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합니다.
준원은 17차례나 칼에 피격당해 숨을 거둬야 했어요. 양형기준에 따르면 이 사건은 ‘10~17년’의 형량이 기본형인 보통동기살인이라고 하더군요. 가중처벌은 15년에서 무기징역까지 천차만별로, 모두 재판부의 판단에만 맡겨야 합니다.
처음 양형기준을 확인했을 때, 눈을 의심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송두리째 사라지고, 유족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받는데도, 낮은 형량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법조인에게 물어보니, 한국은 엄벌과 피해자 치유보다는 ‘교화주의’를 택한 나라라서 그렇다고 합니다.
하지만 교도소는 교화는커녕 범죄자들의 연계망이 되었고, 이미 포화상태라 살인을 저질러도 가석방으로 풀려나는 비율이 매년 늘어나는 실정입니다. 피해자의 치유와 재발 방지에 초점을 맞춰야 할 책임이 있는 사법제도마저, 피해자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사회를 향한 믿음과 미래에 대한 아주 작은 희망도 꺼져버리는 것만 같습니다.
형량이 적게 나올 수도 있다는 불안이 고개를 들 때마다 눈물이 납니다. 준원이 불현듯 떠오를 때마다 숨쉬기가 힘들어 공황장애 약을 먹습니다. 약이 없으면 잠들지 못합니다. 피해생존자인 저는 이미 수명이라는 형벌을 받고, 감옥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법제도마저도 가해자 중심적으로 형성돼 있다는 현실이, 저를 더욱 고통과 분노에 몸부림치게 만듭니다.

재판부가 A에게 ‘가석방 없는 최고형’을 내리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끔찍한 사건으로 잃고 겪어야 하는 고통, 무차별적인 언론 보도와 재판 과정에서 겪는 2차, 3차의 고통들…. 다른 사람들은 이 고통과 불안을 모르고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평범하게 출근하고 퇴근해서 가족들에게 인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친구, 동료, 시민들은 그런 평범한 오늘이 내일도 미래에도 이어질거라 생각하며 살아가길 소망하면서, 저는 오늘도 재판 준비에 골몰합니다. 제가 준원이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이 재판뿐이니까요.
“제가 같이 무기징역을 살아야 한대도 상관없으니, 제발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을 선고해 주십시오. 이렇게 간절하게 애원합니다.”
지난달 17일 열린 가해자의 형사재판에서, 제가 직접 증언한 마지막 말입니다. 온전한 제 진심이에요. 절대로 저와 같은 사람이 또 생기지 않으면 좋겠습니다.(관련기사 : <반성 없는 살인자와 언론… 유족은 사과받지 못했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회복’을 위해 법이 허락한 최고형이 선고될 수 있도록, 한국의 양형기준이 피해자를 위한 기준으로 바뀔 수 있도록 함께 목소리를 내주세요. 그 누구도 준원과 저와 같은 상황에 처하지 않길 바랍니다. 오늘 하루도 안전하게 보낼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 유족의 요청으로 ‘마포구 흉기피습 사건’ 가해자 강력처벌 촉구 탄원서 링크를 첨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