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종이 울려 교실에 들어가면 경수(가명)는 늘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겨울잠과도 같은 길고도 집요한 수면은 개학 후 1개월 가까이 이어졌다. 이러다 얼굴 잊겠다 싶어 깨우면 잠시 고개만 들 뿐, 경수는 곧바로 엎드려 두 팔로 얼굴을 감쌌다.
이건 분명 교사인 나에 대한 도발이었다.
“김경수, 일어나. 뒤로 가서 서서 수업 들어. 잠들지 않을 자신 있으면 그때 자리에 앉아.”
내일모레면 성인이 되는 열아홉, 고교 3학년 경수는 차갑게 날 한 번 노려보고 교실 뒤로 걸어갔다. 이렇게 신경전이 끝나면 좋을 텐데, 녀석은 한쪽 팔을 사물함에 기댄 채 졸기 시작했다. 키 180cm가 넘는 경수의 머리와 무릎은 수시로 꺾였고, 이번엔 그 좀비 같은 움직임이 내 신경을 긁었다.
‘나는 좀비와 싸우려고 그 힘든 과정을 거쳐 교사가 된 걸까?’
가슴 깊은 곳에서 자괴감이 올라와 창밖 운동장을 멍하게 바라봤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일제히 나를 향한 아이들의 시선이 느껴져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반장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폈다.
“인사… 할까요?”
수업 마치는 종은 벌써 울렸고, 나는 그걸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인사를 마치자 경수는 침대에 눕 듯이 책상에 엎드렸다. 비로소 녀석에게 찾아온 안식과 평화.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 내 마음속 자괴감.
내가 일하는 이 학교는 대구에 있는 한 사립 공업고등학교다. 이 한 문장으로 모든 상황을 이해한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독자가 많을 듯하다. 오늘날 ‘공고‘는 여러 부정적인 걸 은유하니 말이다.
공고 국어 교사로 채용이 확정된 날, 부모님은 나를 안고 엉엉 우셨다. 공고에 대한 선입견이 없는 분들이니, 안타까운(?) 마음에 그러신 건 아니다.
나의 아버지는 초등학교만 졸업한 페인트공이셨다. 어머니 역시 초등학교까지 다니고 방직공장에서 오랜 세월 일했다. ‘저학력 육체노동자’ 출신의 부모님에게 교사 아들은 큰 자부심이었다. 교사 꿈을 향한 나의 ’10년 우여곡절‘과 특이한 이력도 부모님의 눈물을 자극했다.
고교 시절, 취업이 쉽다는 말에 나는 문과가 아닌 이과를 택했다. 대학은 학비가 싼 지방 국립대학교, 성적이 낮은 농대에 진학했다. 특기나 적성이 아닌 오직 집안 형편에 따른 선택만 했으니, 대학에서도 꿈과 목표는 딱히 없었다.
그 시절, 가난한 집 아이들이 대개 그랬듯이 나도 1학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병을 지도하는 보직을 맡았는데, 누군가를 가르치는 게 재밌고 적성에도 맞았다. 교사를 향한 꿈은 그렇게 시작됐다.
내 전공인 농대에서는 교사가 될 수 없으니, 복학 후 국어국문학을 복수 전공했다. 졸업 후 교육대학원에 진학했다. 보통 하루 15시간 독서실에 앉아 임용고시를 준비했다. 드디어 치른 임용고시, 나는 보기 좋게 탈락했다. 집은 가난했고, 아르바이트로 모아둔 돈도 떨어졌다.
살려면, 다음을 모색하려면, 일단 돈을 벌어야 했다. 기간제 교사로 일하기 위해 대구와 그 일대 사립-공립학교 약 100곳에 원서를 썼다. 반년짜리 기간제 교사 1명 뽑는데, 약 150명이 지원하기도 했으니 계약직 교사도 하늘의 별 따기였다.
무엇보다 ‘이과-농대-복수전공-교육대학원’ 출신의 국어교사를 원하는 학교는 없었다. 누구도 원하지 않으니, 스펙을 높여보자는 마음으로 국어교육학 박사 과정에 진학했다. 이때 한 공고의 계약직 국어교사로 일할 기회를 얻었고, 3년 뒤에 정식 교사로 채용됐다.
이 순간 부모님도 울고 나도 울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걱정스런 반응을 보였다. 한 친구는 이렇게 물었다.
“힘들게 공부해서 교사가 됐으면 인문계 고교를 가야지, 넌 왜 하필 공고를 택했냐? 거기 좀 그렇지 않아?”
이런 솔직한 말은 오히려 괜찮은 편에 속했다. 가까운 지인 중에는 나를 타인에게 소개할 때 아예 ‘공고‘를 빼고 ‘고등학교 국어교사‘로만 소개했다. 내 주변 사람들, 즉 대학을 졸업한 화이트칼라 계층에게 공고라는 말은 금기어에 가까웠다.
교사 집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학생 성적과 부모 경제력은 비례하고, 그에 따라 외고-과학고 등 특목고는 ‘저 위에‘, 공고 등 특성화고교는 ‘한참 아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교사들의 걱정과 우려는 한층 더 심각했다.
어떤 모임에서 만난 한 교사는 나의 소속을 알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내가 “괜찮다, 아이들 착하고 가르칠 만하다“고 해도 그의 안타까운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어떤 대답을 하든 상대의 반응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교사인 나도 이런 대우를 받는데, 교복 입고 공고에 다니는 아이들은 어떤 취급을 당할지 상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10여 년 근무 경험으로 따져보면, 공고에 진학하는 아이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먼저, 가정 형편이 어려워 일찍 돈을 벌어야 하는 아이들. 몇 해 전, 내가 담당했던 우리 반 아이들 중 과반이 기초생활수급 혹은 한부모 가정 출신이었다.
다음은 중학교 시절 밤늦게까지 학원에 다니며 노력했지만, 경쟁에 밀려 어쩔 수 없이 공고에 온 아이들이다. 이 학생들은 스스로를 실패자로 인식했고, 어떻게든 인문계 고교로 전학해 공고 꼬리표를 떼려고 노력했다.
나머지 한 부류는 각종 사건 사고에 연루돼 필연적으로(?) 공고에 온 아이들이다. 이 학생들은 입학 후 제대로 등교하지 않고 끝내 자퇴하거나, 학교에 남더라도 대체로 무기력하게 지냈다.
이 세 부류 아이들에겐 공통점이 있으니, 누구도 스스로 원해서 공고에 온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얼굴 잊을까 걱정될 만큼 잠만 자던 경수는 어느 부류에 속하는 아이일까?
신경전을 치른 다음 날에도 경수는 엎드려 있었다. 나도 지치고 힘들어 그날은 포기하고 녀석을 깨우지 않았다. 대신 수업을 마친 뒤, 숙면에 빠진 경수에게 다가갔다.
“경수야, 선생님이랑 얘기 좀 하자.”
나의 제안마저 ‘쌩까면’ 어쩌나 싶었는데, 경수는 졸린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녀석은 나의 초대에 응했다.
상담실에 어색하게 마주앉았을 때는 나는 경수에게 질문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대신 “날마다 엎어져 자는 네가 많이 밉다“고 말한 뒤 “네 사정을 그동안 묻지도 않고 미워해서 교사로서 미안하다“고 털어놨다. 솔직한 마음이었다. 이어 내가 겪은 가난한 청소년 시절의 분노와 농대 출신 국어교사로서 겪은 어려움과 차별을 털어놨다.
경수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내 이야기를 들었다. 내 말이 끝났을 때, 녀석은 딱 한 번 입을 뗐다.
“말씀 끝나셨으면, 나가도 되죠?”
세상에, 이렇게 허무할 수가. 다음날 수업에 들어갔을 때, 기대와 달리 경수는 또 엎드려 있었다. 다만, 수업 마치고 반장이 인사할 땐 자기 스스로 일어나 내게 고개를 숙였다. 이건 놀라운 변화이자 별일이었다.
경수의 깨어 있는 시간은 조금씩 늘어났다. 수업에 집중하지 못해도 눈 뜨고 있는 시간을 연장하려는 노력도 보였다. 며칠 뒤 수업 마치는 종이 올렸을 때, 경수는 나를 따라 나왔다.
“선생님, 드릴 이야기가 있는데요.”
공수가 뒤바뀐 상태로 우린 상담실에 마주 앉았다. 경수는 묻지도 않은 말을 자기 혼자 풀어내기 시작했다.
“학교의 많은 친구들 부모님처럼… 엄마, 아빠가 크게 싸우고 두 분 모두 집을 나갔어요. 중학교 다니는 동생이 있는데, 제가 생계를 책임져야 합니다. 엄마, 아버지를 생각하면 짜증나서, 저도 확 가출하고 싶은데… 그럼 동생 혼자 남잖아요. 학교 마치면 바로 ○○○에 가서 새벽 5시까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학교 오는 게 너무 힘들어 자퇴도 생각하고 있는데, 지금은 어떻게든 버티는 겁니다.”
경수는 졸린지, 아니면 눈물이 나는지 연신 눈을 비볐다. 180cm 넘는 녀석의 넓은 어깨가 몇 번씩 출렁거렸다.
“공부요? 제가 어떻게 공부를 합니까?! 학교에서 잠을 안 자면 저는 언제 어디서 잠을 잡니까? 꿈이요? 학교에서 깨어 있으면 일하다 죽거나 굶어 죽을 거 같은데, 어떻게 꿈을 꿉니까?”
이번엔 내가 자꾸 눈을 비벼야 했다.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 나는 다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경수를 한 번 안아줬다.
특목고 혹은 인문계 학교였다면 이런 사연은 특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감스럽고 안타깝게도 공고에서 일한 10여 년간 비슷한 처지의 학생을 숱하게 만났다. 자기 성적이나 미래보다 부모님 처지를 걱정하고, 수중에 남은 마지막 1000원을 동생 통학 차비로 양보한 채 자기는 10km 넘게 걸어서 지각 등교한 아이도 있었다.
비참한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동생에게 차비를 양보하고 걸어서라도 끝내 학교에 온 그 아이에게서 어떤 희망을 봤다. 대한민국 사람들 다수가 부정적으로 여기는 이 공고란 학교도 누군가에겐 어떻게든 와야 하는 곳이었다.
그 아이는 한 끼의 점심 급식을 위해, 그저 친구들과 놀기 위해 그 먼 길을 걸었을 수 있다. 학교에 오는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부모님 없는 쓸쓸한 집이나 막막한 거리보다 안전하고 따뜻한 학교를 만들어 주고 싶을 뿐이다.
무엇보다 교사로서 나는, 마지막 남은 1000원을 동생에게 양보한 그 학생의 마음을 지지하고 지켜주고 싶었다.
연재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를 통해, 어디에나 있지만 누구도 존중하지 않는 이 시대 공고와 공고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학력과 경제력에 따라 차별과 배제가 촘촘하게 작동하는 한국에서, 취업에 나가 죽거나 혹은 손가락 몇 개 잘렸을 때에만 눈길 한 번 겨우 받아보는 이 시대의 공고생들은 어떤 꿈과 좌절, 웃음과 눈물 속에서 살아가는지,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공고, 공고생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시선이 조금은 누그러지고 이해와 배려의 지평이 넓어지길 바랄 뿐이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이 내게 주는 원고료는 ‘셜록 장학금’으로 쌓인다. 박상규 셜록 대표의 월급 일부도 여기에 다달이 쌓인다. 이 돈은 어려운 처지에 놓인 공고생들의 차비, 생활비로 쓰일 예정이다.
지한구 교사 longlong1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