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학 위기에 처한 조민우(가명, 당시 고교 1학년)의 어머니는 BMW 승용차를 타고 학교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어머니는 교무실로 들어오자마자 교감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교감 선생님,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제발요. 마지막입니다. 우리 민우에게 기회를 주실 때까지 저는 일어나지 않겠습니다.”
학부모가 무릎을 꿇다니. 교사들은 모두 충격에 빠졌다. 단단히 마음먹은 듯 교감 선생님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안 됩니다. 이미 충분히 기회를 드렸습니다. 민우 데리고 가십시오.”
“민우에게 기회를 주실 때까지 저는 일어나지 않겠습니다.”
학생부장 교사가 나섰다.
“민우 어머님, 이러면 자퇴도 안 됩니다. 퇴학이에요. 퇴학! 벌써 몇 번째입니까? 애가 말을 안 듣는데 저희가 어쩌겠습니까. 민우는 도저히 안 됩니다. 제발 일어나세요.”
민우 어머니는 일어나 체념한 듯 말했다.
“공고도 졸업 못하면 우리 아들은 사람 구실 하면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선생님들이시잖아요. 제발 방법을 좀 찾아봐 주세요. 제발요….”
민우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학생이었다. 입학 후 거의 매일 지각했는데, 늘 대중교통 대신 오토바이를 타고 등교했다. 교복 대신 반바지에 슬리퍼,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말이다.
교실에 오면 책상 위에 책을 펴고, 그 위에 모포를 깐 뒤 팔베개 인형을 꺼내 곧바로 얼굴을 묻고 잤다. 늘 지각했으니 조례에 참여하지 않았고, 휴대폰도 제출하지 않았다.
민우는 점심시간에 학교를 무단이탈해 학생부로 잡혀왔고,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다 학생부로 끌려왔으며, 수업 중에 학교 밖으로 나갔다가 또 학생부로 호출당했다. 하루 동안 민우가 받은 벌점은 20점이 넘었다.
무단 지각 1점, 오토바이 탑승 10점, 휴대폰 소지 1점, 수업태도 불량 1점, 무단이탈 1점, 교내 흡연 5점, 무단 조퇴 1점, 교사 지시 불이행 2점.
민우의 벌점이 쌓일수록 부모의 학교 방문은 잦아졌다. 학교는 벌점 30점이 넘으면 학부모 학교 방문, 40점 이상은 교내봉사, 50점 이상은 사회봉사, 60점 이상은 퇴학 조치를 할 수 있다.
당시 나는 학생부 소속이어서 민우 같은 일명 ‘문제학생‘과 자주 대면했다. 민우는 하나도 거칠지 않았으나, 한없이 무기력했다.
“그냥 벌점 주시면 되잖아요. 제가 벌점 받겠다는데 샘이 왜 난리인데요?”
누구도 민우의 마음을 열지 못했다. 담임교사는 얼른 민우가 벌점 받고 퇴학당하기를 바라는 눈치였고, 민우의 반에서 수업하는 교사들도 점점 지쳐갔다. 입학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선도위원회가 열렸다. 민우 어머니도 출석했다.
“조민우 학생. 매일 지각하고, 마음대로 학교에서 나가고, 담배 피우고…. 자기 멋대로인데, 학생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선도위원회 위원장인 교감이 훈계와 질책을 했다. 민우 어머니가 나섰다.
“죄송합니다. 다 제가 잘못 가르친 탓이에요.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엄마와 달리 민우는 뻣뻣한 모습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극을 관람하듯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선도위원회는 징계위원회와 같은 기능을 하는데, 사안의 경중에 따라 학생에게 교내봉사, 사회봉사, 출석 정지, 퇴학 등의 징계를 내릴 수 있다. 중학교까지는 의무교육이어서 학생이 큰 잘못을 해도 퇴학시킬 수 없지만, 고등학교에서는 퇴학도 가능하다.
학기 초 누군가 퇴학당하면 ‘문제학생들‘은 중학교와 다른 환경을 인식하고 교칙을 지키려 조금이라도 노력한다. 하지만 민우는 달랐다. 마치 목표가 퇴학인 양 거침없이 폭주했다.
첫 선도위원회에서 민우는 교내봉사 10시간 징계를 받았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민우는 다시 선도위원회에 회부됐다. 교감의 질책이 반복됐다.
“조민우 학생. 징계 미이수, 지시 불이행 등으로 벌점이 더 높아졌네요. 어떻게 단 한 시간도 교내봉사를 안 할 수가 있죠?”
민우는 이번에도 침묵. 다시 어머니가 나섰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꼭 징계를 이수하도록 가정에서 잘….”
“어머니, 잠시만 계셔보십시오. 민우 학생의 의견이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조민우 학생, 어서 대답해보세요.”
인내의 한계에 이르렀는지, 교감은 어머니의 말을 끊었다. 학생부장 교사가 나섰다.
“교내봉사는 학습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방과후에 이뤄집니다. 하지만 민우는 수업 마칠 때까지 학교에 남아 있지를 않아요. 도망 못 가게 휴대폰을 제출받고, 가방도 미리 맡아봤지만 다 내팽개치고 집에 가버립니다. 저희 학생부에서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민우에겐 교내봉사보다 한 단계 높은 사회봉사 명령이 떨어졌다. 민우 어머니는 아들의 벌점을 줄이고 어떻게든 퇴학을 막으려 ‘학부모 동반 수업‘(벌점 5점 차감)까지 참여했다. 하지만 그날도 민우는 엄마 앞에서 팔베개 인형에 얼굴을 묻고 잤다.
민우는 2주 만에 3차 선도위원회에 회부됐다. 녀석은 사회봉사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지각과 무단 조퇴는 이어졌다. 1학년 1학기 만에 벌점 60점 초과, 퇴학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학교가 베풀어줄 수 있는 선처는 퇴학 전 자퇴 권고였다. 자퇴를 하면 다음 해에 다시 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 민우 어머니는 학교로 달려와 교무실에서 무릎을 꿇었다. 앞서 묘사한 바로 그 상황이다.
자식을 위해서 모든 걸 다 하는 어머니와 뭘 해도 달라지지 않는 야속한 아들. “공고도 졸업 못하면 사람 구실이나 하겠느냐“는 슬픈 말과 “그래도 당신들은 선생님이 아니냐“는 눈물겨운 호소…. 공고의 교무실은 무기력할 정도로 적막했다.
많을 때는 한 해에 약 40명의 학생이 자퇴하거나 혹은 퇴학을 당하는 우리 공업고등학교. 방학을 제외하면 매달 네 명, 즉 일주일마다 한 명씩 학교를 떠난다는 의미다. 선도위원회가 퇴학 처분을 결정하는 일명 ‘손에 피를 묻힌 날‘, 학생부 소속 교사들 마음은 소금밭이 된다. 교사로서 학생에게 “더는 학교에 오지 말라“고 통보하는 건 무척 고통스런 일이다.
결국 민우에게는 퇴학 처분이 잠정 결정됐다. 그날 학생부 교사들은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오늘… 민우 어머니 너무 불쌍하지 않던가요? 무릎까지 꿇을지는 몰랐는데….”
동료 교사의 슬픈 넋두리가 이어졌고, 결국 잔뜩 취한 내 입에선 많은 말이 터져 나왔다.
“만날 애들 잡아도 혼내고, 징계주고… 진짜 돌아버리겠어요! 학교가 무슨 경찰서도 아니고…. 솔직히 우리, 문제아들 싹 다 잡아서 쫓아내고 싶잖아요. 그러면 속도 편하고. 선생님들, 제 말이 틀렸습니까? 우리 학생부가 애들 바로잡는 부섭니까, 애들 때려잡는 부섭니까? 아니, 우리가 선생님입니까, 형삽니까?”
“지 선생, 술 많이 마셨다. 고마 해라!”
부장 교사의 만류에도 나의 술주정(?)은 멈춰지지 않았다.
“민우 이렇게 될 거 다들 알고 계셨죠? 과거에도 그랬잖아요. 어차피 안 될 애들은 징계 줘서 빨리 내보내고, 살아남은 아이들만 데리고 간다… 그런 거 아닌가요? 제 말이 틀렸나요?”
해서는 안 될 말, 혹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하지 않은 말이, 정제되지 않은 술주정으로 나왔으니, 그날의 회식은 피바람이 불듯이 위태로웠다.
“술 많이 먹었다. 고마 가자.”
학생부장을 시작으로 교사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날, 학교에선 긴 회의가 열렸다. 피바람은 불지 않았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학교는 민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학생부에서는 치열한 토론을 거쳐 ‘너와 나 바로서기 프로젝트‘(이하 바로서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학생부가 학생 자르는 곳이 아닌 학생을 살리는 곳으로 거듭나기로 한 것이다.
우선 학생부는 전교생 중에서 벌점이 높은 1위부터 20위까지 일명 ‘고위험 학생‘을 추렸다. 이 아이들 대부분은 벌점 40점이 넘었고, 60점 초과로 곧 퇴학을 통보받을 학생도 있었다. 학생부 교사들은 이 학생들을 선제적으로 관리해, 어떻게든 살려보기로 했다. 그 일환으로 학생부 교사 한 명당 학생 두 명씩 맡아 어떻게든 졸업을 시키기로 했다.
나의 술주정을 정책으로 발전시킨 학생부장 선생님은 고위험 학생 중에서도 최상위권인 강두석(가명, 당시 2학년)을 맡았다. 두석이는 말과 행동이 거칠어서 늘 문제인 아이였다. 자신의 문제를 지적한 교사에게 거칠게 대들어 퇴학 위기에 처했다.
학생부장 선생님은 많은 교사들이 포기한 그 두석이를 어떻게든 달래고, 통제하고, 가르쳐서 고교 졸업장을 안겨주겠다는 계획을 짰다. 교사들은 물론이고 학생들도 비웃은 그 계획을 학생부장은 밀어붙였다.
두석이가 사고를 칠 때마다 학생부장은 두석 아버지를 학교로 불렀다. 그럴 때마다 두석 아버지는 불편해하는 기색 없이 교사의 말을 잘 경청하며 “가정에서도 잘 교육시키고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나와 친한 A 교사는 ‘고위험 학생 중 가장 순한’ 양범준(가명, 당시 1학년)을 맡았다. 범준이는 결석이 잦을 뿐 사건사고를 일으킨 아이가 아니었다. 늘 차분하고 성실하기까지 했으니, 어쩌다 고위험 학생이 됐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범준이가 학교를 졸업하는 건 당연해 보였다. 나는 A 교사가 부러웠다.
술주정의 대가였는지, ‘조민우 졸업시키기‘는 나의 몫이 됐다. 나는 민우가 자주 어울린다는 ‘동네 형들‘을 만났고, 오토바이를 빌려주는 업주를 찾아가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내가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민우는 신기루처럼 멀어져갔다. 마음의 문은 조금도 열리지 않았다. 민우는 무기력했다.
“샘, 저 포기하세요. 저는 그냥 학교가 싫고, 견딜 수 없을 만큼 답답해요.”
민우 어머니는 민우의 방과후 비행을 막기 위해 사설 경호원을 두 명이나 고용했다. 그 덕에 덩치 좋은 검은 양복의 경호원 두 명이 우리 학교 정문 앞을 지키는 진풍경까지 벌어졌다.
경호원의 임무는 민우의 학교 무단이탈 방지, 하교 후에는 집으로 데려가기였다. 나는 종례를 마치면 민우를 교문까지 데려가 두 경호원에게 이후를 맡겼다. 민우 가족-경호원-학교의 ‘합동작전’ 덕에 민우의 학교 무단이탈은 사라졌다. 벌점 쌓이는 속도가 확실히 줄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고위험 학생에겐 이미 쌓인 벌점을 줄이는 것도 필수였다. 우리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사제동행 프로그램과 집단 상담, 교내외 봉사, 등산 등 다양한 행사를 기획해 학생의 참여를 유도했다. 여기에 참여하면 ‘상점‘을 부여했는데, 이 점수는 벌점 줄이기에 매우 유용했다.
이 간단한 일은 실행만 하면 되는데, 고위험 학생에겐 이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었다. 제 시간 등교가 힘들어 자주 지각하는 아이들에게 ‘사제동행 주말 등산‘은 그야말로 고행에 가까운 ‘넘사벽‘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나. 평일에 쌓은 벌점을 주말에 상쇄하지 않으면 졸업은 물 건너가니 말이다. A 교사가 맡은 범준이는 성실하게 주말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지각을 하지 않았고, 이런저런 지적을 하기 전에 늘 먼저 움직였다. 교사들의 특별한 관심이 힘이 되는 듯했다.
고위험 학생 중 ‘탑(top)’이었던 두석이는 아버지의 도움과 재촉으로 겨우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녀석의 상담은 욕설로 출발했고, 사제동행 등산은 짜증과 분노로 끝나기 일쑤였다. 학생부장은 묵묵히 견디고 참았다.
민우는 경호원의 에스코트를 받거나 엄마의 BMW를 타고 무기력한 얼굴로 등산로 입구에 나타나곤 했다. 약속된 시각에서 한참 지난 상태에서 말이다. 억지로, 꾸역꾸역, 답답한 얼굴로. 그래도 나타난 게 어딘가 싶어 나는 억지로라도 웃었다.
‘바로서기 프로젝트‘를 통해 민우는 겨우 2학년으로 진급했다. 민우 어머니는 여전히 자주 학교로 불려왔고, 나 역시 민우 담임과 수업 교사에게 수없이 사과하고 다녔다. 그야말로 산 너머 산이었다.
학생부가 힘들게 진행한 ‘바로서기 프로젝트‘에도 우리는 ‘고위험 학생 20명’ 중에서 절반만 살릴 수 있었다. 많이 노력했으나 학생 10명이 자퇴, 혹은 퇴학으로 학교를 떠났다. 학생부장이 맡은 사고뭉치 두석이, A 교사가 맡은 순둥이 범준이, 내가 맡은 무기력 민우는 어떻게 됐을까.
우선, 고위험 학생 중 ‘탑’이었던 강두석은 학생부장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졸업에 성공했다. 두석 아버지도 많은 고생을 했다. 성인이 된 강두석은 최근 학교에 찾아와 “졸업하도록 도와줘서 고맙다“며 당시 학생부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학생부장 교사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민우 역시 졸업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연락하고 지내지 않는다. 민우가 학교에 찾아오는 일도 없다. 민우가 무기력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살길 바랄뿐이다.
순둥이 범준이는 1년도 안 돼 퇴학을 당했다. 고위험 학생 중 누구보다 성실하고 착했던 범준이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어느 순간부터 아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A 교사는 물론이고 친구들의 연락도 받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진실과 내막은 아무도 모른다. 막연하나마 하나는 추정할 수 있다.
조민우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의 곁에는 무릎 꿇는 것을 불사하는 엄마와 검은 양복의 경호원이 있었다. 강두석의 곁에는 학교의 부름을 외면하거나 불쾌하게 여기지 않는 묵묵한 아버지가 있었다.
하지만 순둥이 양범준에게는 부모가 없었다. 범준이는 할머니와 둘이 살았다. 사라진 범준이를 끝까지 찾을 힘과 여력이 할머니에겐 없었다. 범준이는 언제나 혼자였다.
부모의 재력과 학력이 아이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말이 더는 뉴스가 아닌 세상. 공고에서 일하다 보면, 재력이나 학력 따위는 다 필요 없고 부모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둘 다가 어렵다면 엄마-아버지 중 한 명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아이들을 자주 본다.
지금쯤 범준이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사라진 범준이를 생각하면 슬프다. 끝내 지켜주지 못해서 많이 미안하다. 부디, 건강하게 잘 지내길 바랄 뿐이다.
글 지한구 교사 longlong19@hanmail.net
그래픽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