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스마트폰 화면에 제자 민준이(가명) 이름이 떴을 때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또,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걸까. 심호흡을 하고 문자메시지를 열었다.

“규빈이랑 술 한잔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이야기가 나와 생각나서 문자 보냅니다. 곧 찾아뵙겠습니다.”

술 한잔 하다가 옆 테이블이랑 실랑이가 벌어졌다는 내용으로 끝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민준이는 2014년 3학년 우리 반 반장이었다. 졸업한 지 한참 지났는데도, 늦은 밤의 연락에 이렇게 긴장부터 하다니. 지방 사립 공고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나의 징크스다.

공고 등 직업계 고교에서 일하는 교사들은 비슷한 마음일 거다. 크든 작든 사고를 쳤거나 곤란한 일을 겪었을 때 많은 공고생은 교사에게 연락을 한다. 유감스럽게도 늦은 밤의 제자들 연락은 대개 그런 내용이다.

오래전, 민준이가 졸업한 지 2주 만에 연락했을 했을 때도 그랬다. 새벽이었는데, 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샘, 여기 경준데예. 일 좀 생겼십니더. 우리 반 아들(아이들)끼리 (차를) 렌트해가 놀러 왔는데, 사고를 냈뿓십니더.”

머릿속에 음주운전, 대형 인명사고 등 온갖 부정적인 것들만 떠올랐다. 아이들은 졸업 기념으로 몇몇이 모여 차를 빌려 경주로 여행을 떠났고, 숙소 인근 골목에서 접촉사고를 냈다.

그 사고를 낸 후 렌터카 업체에게 먼저 알려야 하는지, 상대방 차주에게 연락을 해야 할지, 부모님과 먼저 상의를 해야 하는지를 두고 녀석들은 열띤 토론을 했고, 오랜 심야토론 끝에 이젠 졸업도 했으니 덜 혼날 것 같은 ‘옛 담임’인 내게 연락을 한 거다.

늦은 밤 제자의 연락에 이렇게 긴장부터 하다니. ‘공고 선생’인 나의 징크스다. 자료사진 ⓒpixabay

허무했다. 하지만 큰 사고가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그날은 꿀잠을 잤다. 누군가는 ‘뭐 이런 일로 교사에게 연락을 할까’ 싶겠지만, 나의 제자들에겐 자연스런 일이다. 아이들의 각종 민원 해결, 공고에서 일하는 나의 역할 중 하나다.

일반고에서 3학년 담임교사의 주요 업무는 아이들을 대학으로 진학시키는 것이다. 공고에서는 차이가 있는데, 아이들 대부분이 진학이 아닌 취업을 하기 때문이다. 스무 살 아이를 더 높은 교육기관으로 보내는 것과 사회로 내보내는 건 하늘과 땅 차이다.

공고 3학년 담임은 공부만이 아니라 ‘직장 예절’ 같은 것도 수시로 가르쳐야 한다. 특히 우리 학교에는 ‘성공적인 직업생활’이라는 과목이 모든 학과의 공통 과목으로 편성돼 있을 정도다. 아무리 교육하고 알려줘도, 곧 사회에 나갈 열아홉 살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 불안한 마음은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다.

뉴스에서는 대학을 졸업하고, 서른을 넘겨서도 독립하지 않은 채 부모님 집에 얹혀 사는 ‘캥거루족’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이런 뉴스를 보면, 어김없이 내 머리엔 우리 학교의 열아홉 살 아이들과 그동안 학교를 떠난 졸업생들이 떠오른다.

얹혀 살 부모와 집이 있고, 서른 살이 되어서도 일을 안 해도 밥을 굶지 않는 현실은, 열아홉 살이면 대부분 일터로 나가야 하는 공고생에겐 꿈같은 이야기다.

너무 이른 나이에 독립을 해야만 하는, 고교 졸업과 동시에 학업을 끝내는 공고생들은 그만큼 인맥과 학맥이 짧다. 의지할 어른이나 곤란한 일을 겪었을 때 자문이나 도움을 청할 사람이 주변에 적을 수밖에 없다. 자동차 접촉 사고를 내고 전 담임에게 연락해 문의하는 건 내 제자들에게 자연스런 일이다.

졸업한 뒤에도 곤란한 일을 겪었을 때 ‘옛 담임’에게 연락하는 건 공고생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료사진 ⓒ지한구 제공

공고생들은 졸업 뒤 다시 학교를 찾아오는 비율이 높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며 새 취업처를 문의하거나, 어렵게 취업한 공장이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졸업생이 많다. 이런 기능적 이유 외에 ‘졸업생 회귀’에는 지방 공고만의 독특한 환경과 문화에서 비롯되는 면이 있다.

늦은 밤에 문자메시지를 보냈던 민준이는 며칠 뒤 졸업 동기 규빈(가명), 종훈(가명)이와 함께 학교에 찾아왔다. 이유가 있었다.

“선생님, 저 미용사로 계속 일하고 있는 거 아시죠? 근데, 이제는 일본으로 떠나려구요. 와이프 혼자 아 키우게 하는 것도 미안하고. 일본에서 자리 잡을라 캅니더.”

우리 반 반장이었던 민준이는 미용사가 됐다. 졸업 후 공장에 취업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따로 미용을 배웠다. 민준이는 요즘으로 치면 다소 젊은 27세에 일본인과 결혼을 했다. 서른 살인 지금,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됐고 해외 이주를 준비하고 있다.

규빈이는 술을 좋아했다. 졸업 직후에는 “선생님과 술 마시는 게 소원이었다”면서 그렇게 전화를 자주 했다. 녀석이 군대 가기 직전, 나는 우리 집으로 따로 불러 저녁을 먹이고 술도 한 잔 따라 줬다.

제대 후 규빈이는 제주도의 호텔에서 일했다. 2025년 지금, 규빈이는 제주도 생활을 청산하고 부모님이 운영하는 사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아마도 부모님의 일을 물려 받아 대구에 정착할 듯싶다.

종훈이는 키 190cm에 100kg이 넘는 몸무게,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명 ‘조폭 체형’으로 교무실에 등장했다. 녀석이 웃으며 문을 열지 않았다면, 나를 비롯해 여러 선생님은 깜짝 놀라 뒷걸음을 쳤을 거다. 종훈이는 대구 시내에서 삼겹살집을 운영하고 있다.

미용사, 호텔 노동자, 고깃집 자영업자가 되어 학교에 찾아오는 나의 제자들. 교수, 의사, 판사, 검사가 아니어도 웃는 얼굴로 모교를 찾아오는 졸업생, 그리고 이들과 옆집 이웃처럼 이야기를 나누는 교직원들. 우리 공고에는 한국 사회가 왕년에 잃어버린 어떤 풍경이 아직 남아 있다.

헬멧을 쓴 채 고개를 꾸벅 하고 지나가는 배달 라이더가 있다면 십중팔구… ⓒpixabay

우리 학교만의 특별한 정이란 게 있는 걸까?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에겐 다른 차원의 연결고리가 있다. 나를 비롯한 교직원들에겐 공통의 징크스가 있는데, 바로 ‘대구에서 외식이나 술을 마시면 꼭 재학생이나 졸업생을 한 명 이상 만난다’는 점이다.

맛집으로 소개 받고 갔는데 우리 학교 출신이 사장님이거나, 맥주 한잔 마시러 들어간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제자를 만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도 아니면 배달 라이더 노동자들이 고개 한 번 숙이고 ‘쌩~’ 하니 달려가는 경우도 많다. 헬멧을 쓰고 있어서 얼굴은 안 보이지만, 상대방은 배달 라이더로 일하는 제자들이다.

종일 집에만 있다고 징크스에서 안전(?)한 건 아니다. 가정 방문 택배기사, 가스 검침원, 전자 제품 수리기사 분야에도 우리 학교 졸업생들이 많이 진출해 있다.

얼마 전, 대구 시내에서 친구들을 만나 늦게까지 술을 한 잔 마셨다. 그날따라 나에게 알은 척을 하는 식당 사장님, 아르바이트 노동자, 배달 라이더, 행인이 없었다. 우리 학교 출신을 마주치지 않은, 드디어 징크스가 깨진 날이었다.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싶은 마음으로 택시를 탔다. 그런데 웬걸, 택시기사님이 우리 학교 졸업생이었다. 그렇게 깨진 징크스는 다시 이어졌다.

내가 일하는 공고는 최근까지 학년별로 19학급을 가진, 전국 최대 규모의 학교였다. 학령 인구 감소 등으로 다소 줄긴 했어도 여전히 큰 학교다. 일명 명문 고교 아이들은 졸업 후 서울과 수도권, 외국으로 많이 떠나지만 공고 졸업생들은 대개 학교 인근 고향 지역에 남는다.

지역의 어떤 아이들은 나의 제자가 되고,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서로의 삶을 지탱하고 지켜주는 이웃이 된다. 우리에겐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인재도 필요하지만, 머리를 다듬어 주고 인터넷이 고장 났을 때 빛의 속도로 달려와 나를 세상과 연결시켜 주는 사람도 꼭 있어야 한다.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을 키우는 학교, 그곳이 바로 내가 일하는 공업고등학교다.

특목고, 인문계 고교 등에서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은 대개 서울 등 대도시로 떠난다. 반면 나의 제자인 공업고등학교 아이들은 대개 지역에 남는다. 우리는 서로를 지탱하는 이웃으로 살아간다. 자료사진 ⓒ셜록

최근에 겪은 일도 독자들에게 들려 드리고 싶다. 주말에 학교에서 글을 쓰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도로에서 난폭 운전자를 만났다. 나는 분명 규정 속도에 맞춰 운전하는데, 뒤의 트럭이 자꾸 경적을 울렸다. 차선을 변경하면 다시 뒤로 붙어 상향등을 켜기도 했다. 신호 대기를 위해 멈췄을 때, 트럭이 내 옆으로 붙었다. 난 인상을 쓰고 창문을 열었다.

“샘! 아까부터 샘 차 보고 따라왔심더. ㅋㅋㅋㅋ 근데, 차 바꿀 때 되지 않았어예? 제가 성공하면 바꿔 드릴게예! 나중에 학교로 찾아뵙겠습니더. 건강하시소!”

누군지 기억이 떠오르기도 전에 차는 떠났다. 트럭에는 유명 배송업체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어리둥절했다. 잠시 뒤 떠오른 얼굴은 종민(가명)이었다. 2017년, 내가 2학년 전자과 담임을 맡았을 때 우리 반 소속이었다.

종민이가 2017년 고교 2학년 시절에 적은 ‘장래희망’. 녀석은 꿈을 이룬 셈이다. ⓒ지한구 제공

집에 도착한 나는 컴퓨터를 뒤져 그해 우리가 만든 전자과 문집 <짱구와 아이들> 파일을 찾아봤다. 그 문집에 종민이는 장래 희망을 이렇게 적었다.

1.기기를 수리하고 조립하는 엔지니어. (왜? 내 적성이자 내가 유일하게 다룰 수 있는 기술이어서.
2. 화물을 운반, 배송하는 트레일러 운전기사 (왜? 멋있어 보이고 해보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녀석은 꿈을 이룬 셈이다. 컴퓨터를 끄고도 한참 동안 미소가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주말 내내 기분이 좋았다.

단행본 <공고 선생, 지한구> 표지 ⓒ후마니타스

“누군가는 공고에서 어떻게 가르치느냐고 염려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지난 10여 년간 ‘지방 8학군’을 오가며, 나의 제자들에게 많은 걸 배웠다. 이 책이 내가 누군가를 가르친 흔적이 아닌, 공고에서 보고 배운 증거로 남으면 좋겠다.”

어디에나 있지만 누구도 존중하지 않는 이 시대 공고와 공고생 이야기,
그리고 결국 우리의 이웃으로 오래도록 살아가는 학생들의 이야기.

지한구 교사의 연재 글이 단행본 <공고 선생, 지한구>(후마니타스)로 출간됐습니다.

지한구 교사 longlong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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