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아침에 사라진 아버지들을 ‘복원’하는 일은 75년이 지나도록 끝나지 못했다. 지난 5월 13일 경북 경산시 평산동 ‘코발트광산’ 학살 현장에서 유해발굴 조사가 재개됐다.
일제강점기 자원 수탈을 위해 만든 광산은 폐광 뒤 학살 장소로 ‘활용’됐다.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7~9월, 이곳 코발트광산과 인근 대원골에서 최대 3500명의 민간인이 학살됐다.
군과 경찰은 사람들을 묶어 수직굴 입구에 일렬로 앉게 했다. 그리고 뒷머리에 총구를 댔다.
따다당!
총에 맞은 사람들은 굴 아래로 떨어졌다. 죽어 떨어지기도 하고, 더러는 떨어져 죽기도 했다. 그렇게 무수한 시신이 수직굴과 수평 갱도에 쌓였다. 광산은 그 자체로 거대한 무덤이 됐다.

허리를 숙이고 걸어야 하는 낮은 갱도로, 조사단이 흙수레를 밀고 바쁘게 오갔다. 코발트광산유족회 이사인 최승호 경산신문 대표가 한 발 앞서 걸으며 설명했다.
“여기가 (입구에서) 104m 지점입니다. 왼쪽은 광맥과 연결되는 작은 굴이고, 오른쪽이 수직굴과 연결되는데, 2001년에 우리가 처음 왔을 때는 여기 유해들이 엄청 많았어요.”


2001년 민간 차원에서 진행된 최초의 유해발굴 조사에 이어,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에 의해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매해 유해발굴이 진행됐다. 지금까지 수습된 유해는 약 500구(민간 약 80구, 국가 약 420구)를 헤아린다.
“어어, 너무 가까이 가지 마세요! 갑자기 무너지면 큰일 납니다!”
수직굴과 수평굴이 만나는 곳. 아래쪽은 물웅덩이, 뒤쪽은 위에서 내려온 흙무더기다. 조사단은 물웅덩이 위에 작업대를 걸쳐놓고 올라서서, 뒤쪽의 흙을 퍼내고 돌덩이를 캐내고 있었다.
“수직굴에 흙이 꽉 차 있어요. 실제로 발굴할 데는 여기(물웅덩이 아래쪽)거든요. 갑자기 흙이 쏟아지면 사람이 다치니까, 저 흙을 안전하게 막아놓는 작업을 먼저 하는 겁니다.”


아래쪽으로는 희뿌연 물이 가득 차 있다. 양수기로 물을 퍼내도 몇 시간만 지나면 도로 지하수가 가득 차오른다. 본격적인 유해발굴은 시작도 하기 전에 물과 흙과 씨름을 하는 중이다.
수평굴 입구에는 흙막이 작업 도중 발견된 유해들을 모아뒀다. 7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는 이름 없는 뼈. 길고 긴 세월을 기다려 우리 앞에 나타난, 진실의 퍼즐 조각이다.


코발트광산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데는 일찍이 ‘한 사람’의 목숨을 건 노력이 있었다. 바로 ‘인혁당 조작사건’ 피해자로 잘 알려진 강창덕 선생이다.

4·19혁명 직후인 1960년 5월. 대구매일신문의 강창덕 ‘기자’는 지프차를 타고 경산시 평산동으로 향했다. 그가 남긴 구술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그날’의 이야기는 이렇다.
강창덕은 혼자 카메라를 메고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 사람들을 붙들고 물었다.
“옛날에 6·25 때, 사람 많이 데려다 총살했는 자리가 어딥니꺼?”
모두 말상대를 해주지 않았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게 불과 열흘 전이었다. 뒤숭숭한 시국에 낯선 이가 찾아와 던지는 질문을, 모두 눈을 둥그렇게 뜨며 경계할 뿐이었다.
그러다 한 할머니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요리 올라가면 그 꼭대기에 있어예.”
할머니가 손으로 가리킨 방향을 따라 올라가니 ‘굴’이 있었다. 현장을 덮고 있는 흙을 손으로 만져봤다. 그리고 그의 눈에 어렴풋이 들어온 것. 사람의 유해였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혼자 현장 사진을 찍고 있는데, 문득 인기척이 느껴졌다. 30대 중반쯤 됐을까. 아래위로 검은 작업복을 입고 밀짚모자를 쓴 사람이 강창덕의 주변을 서성대고 있었다.
‘아, 뭔가 할 말이 있어서 나를 따라 올라온 사람이로구나!’
강창덕이 그를 손짓해 불렀다. 작업복의 남자는 1950년 ‘그날’ 자기가 본 것을 이야기했다.
짐칸에 ‘가빠(방수천)’를 씌운 트럭이 몇 날 며칠 수도 없이 왔더란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그 트럭의 짐칸에는 사람이 타고 있었다고. 헌병들 서넛은 총을 메고 그곳을 지켰다. 그리고… 산에서 천둥 같은 총소리가 뒤이어 들렸단다.
강창덕 기자는 남자의 증언과 현장의 증거를 가지고 기사를 썼다. 코발트광산 사건의 진실을 알린 최초의 보도였다.
보도 이후 강창덕 선생은 ‘경산군하 피학살자 실태조사회’를 만들어 직접 피해자를 찾았다. ‘경산유족회’가 결성돼 최초의 위령제도 지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박정희의 5·16 쿠데타. 나라가 다시 뒤집어졌다. 유족회는 해산됐다. 피해자 명단은 불에 탔고, 위령비가 쪼개지고, 희생자 묘지가 파헤쳐진 곳도 있었다. 유족회 인사들은 ‘용공’의 죄를 뒤집어쓰고 끌려갔다. 강창덕 선생도 감옥에 갇혔다. 진실을 향한 걸음도 멈췄다.

2007년 최승호 ‘기자’는 강창덕 선생의 구술을 채록했다. 강창덕과 최승호. 두 사람은 코발트광산 사건을 세상에 알린 기자로, 사건의 진실을 쫓는 연구자로, 역사와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투사로, 30년 세월의 간격을 두고 같은 길을 걸었다.
“강창덕 선생님이 저를 상당히 귀여워(?)해주셨어요. 늘 저를 만나면, ‘최 동지 고맙다, 최 동지 고맙다’ 하시면서.”

1993년 경산향토신문(지금의 경산신문) 객원기자였던 그는 코발트광산 사건 이야기를 보도한다. 당시 그가 맡은 글은 마을을 순례하면서 소개하는 ‘향토기행’ 코너였다.
“이장님, 저 골짜기는 이름이 뭡니꺼?”
“대원골.”
“와 대원골이라 부릅니꺼?”
“큰[大] 원한[怨]이 맺힌 골짜기라꼬 대원골이라 안 카나.”
“와예? 무슨 일이 있었습니꺼?”
이장님은 “거기서 옛날에 억울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죽은 사람들의 피가 마을까지 흘러 내려왔다”는 말도. 하지만 현장을 좀 안내해달라는 부탁에 이장님은 손을 내저었다. 다른 마을 사람들도 묘하게 쉬쉬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최승호 기자는 신문사로 돌아와 자료를 뒤졌다. 일찍이 강창덕이 보도했던 그 사건. 30년 이상 소문처럼, 전설처럼 떠돌던 그 이야기. ‘학살’이었다. 그렇게 첫 기사를 썼다.
그는 보도로 그치지 않고 ‘경산지역사연구회’를 만들어 코발트광산 사건 조사에 뛰어들었다. ‘경산시민모임’을 만들었고, 시민들이 함께하는 진혼제도 1995년부터 매년 올렸다. 하지만 진실을 공론화하고 여론의 힘을 모으는 것은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2000년 1월, 최승호 기자의 가슴을 뛰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재미 학자 이도영 박사가 미국 정부의 기밀자료를 한국 언론에 공개한 것. 한국전쟁 당시 대전형무소의 정치범 1800여 명 등이 ‘골령골’에서 학살당했다는 강력한 증거였다.
“제가 그때 용기를 얻었죠. ‘이제는 경산 코발트광산 얘기도 제대로 할 수 있겠다!’”
신문에 크게 기사를 냈다. 일주일쯤 지났을 때, 노인 세 사람이 신문사를 찾아왔다.
“우리 형님들이 전쟁 때 돌아가셨는데, 기사에 실린 얘기가 형님들 얘기 같은데….”
유족들이었다. 그길로 ‘유족 신고센터’를 만들었고, 이내 ‘코발트광산유족회’가 결성됐다. 이태준 초대 유족회장은 기사를 보고 최승호 기자를 찾아온 세 노인 중 한 명이었다.
최승호 대표가 기억하는 가장 ‘극적인’ 순간은 뭐니 뭐니 해도 2001년 3월이다. 코발트광산 수평굴 입구를 막고 있던 콘크리트 벽을 51년 만에 ‘폭파’해버린 날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앞에 펼쳐진 참상. 쌓이고 쌓인 유해들이 수평굴 입구까지 밀려와 있었다.
“유해들을 보면서 슬프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했죠. 그동안 짐작만 하고 증언으로만 들었던 진실이 실제로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에…. 그때부터 의지가 더 불타올랐죠.”


1960년 강창덕 선생과 유족들의 활동이 5·16 쿠데타로 짓밟히고, 다시 진실규명의 바람이 불기까지 40년의 세월이 걸렸다. 최승호는 강창덕의 길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강창덕이 멈춰야만 했던 곳을 지나, 지금도 계속해서 진실을 향한 걸음을 옮기고 있다.
“처음부터 ‘꼭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게 아니라, ‘우리 지역에 참 가슴 아픈 역사가 있었네’ 정도의 생각이었어요. 그렇게 시작해서 점점 의지가 더해진 거죠. 그래서 아무리 작은 기사라도 끊임없이 썼죠. 지금까지 한 300~400건 쓰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 경산 코발트광산 주변에는 배롱나무가 줄지어 자라고 있다. 나무마다 학살 희생자와 그 유족의 이름이 걸려 있다. 그리고 나무들은 ‘카네이션’ 한 송이씩을 달고 있었다.
“2022년에 배롱나무를 심었거든요. 배롱나무는 1년에 100일 동안 꽃이 피잖아요. 꽃은 영원히 재생된다는 의미가 있으니까. 유골을 묻진 않았지만 수목장 하듯 이름을 새겼어요. 매년 어버이날에 카네이션 달기 행사를 해요. 우리 유족들이 아버지, 엄마를 기리는 방식이죠.”

사실 최 대표는 지금 재개된 유해발굴이 걱정스럽기도 하다. 경상북도와 경산시가 마련한 3억 원의 재원으로 진행되는 조사. 코발트광산은 조사 난이도가 다른 유해 매장지에 비해 훨씬 높다. 하지만 이번에도 제한된 예산 때문에 또 ‘끝’을 못 보고 덮어야 하는 건 아닌지.
“어찌 보면 유족들을 오히려 지치게 하는 건 아닌가…. 이 공간을 후대에 어떻게 기억되게 하겠다는 계획은 아무것도 없이, 그냥 민원 처리하듯….”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은 “다음 세대에 혹시나 일어날지 모를 학살이나 전쟁, 혐오의 정치를 막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동시에 “다시는 이런 국가폭력으로 민간인들을 희생시키지 않겠다는 사회적 다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완전한 유해발굴’이 중요하다.
“코발트광산은 국가에서 평화공원으로 조성해서, 평화·인권 교육의 현장으로 후대에 남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발밑에 유해를 그대로 놔두고 평화공원을 만들 순 없잖아요.”

지난 4일, 이재명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했다. 이 대통령은 올해 말로 활동을 마치는 2기 진실화해위원회의 뒤를 이어 ‘3기 진실화해위원회’를 곧바로 출범시키겠다고 공약했다.
최 대표는 ‘진짜 대한민국’을 표방한 새 정부가 ‘진짜 명예회복’을 해주길 희망했다. 그가 말하는 ‘완전한 명예회복’은 “유족들이 자기 아버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국가가 아버지를 죽이고 나서, 아버지가 죽었다는 말조차 못하게 연좌제로 유족들의 입을 묶어버렸다. 유족들이 수십 년 침묵의 세월을 견디는 동안, ‘그때 죽은 사람들은 빨갱이다’라는 ‘가해자’의 입장만 사회를 점령했다. 유족들은 아직도 그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트라우마죠. 그런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게 보상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유족들이 자기 아버지를 온전하게 복원해야만, 우리 사회도 그 아버지의 명예를 복원해줄 수 있거든요. 유족들이 스스로 자기 아버지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주는 거죠.”
취재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사진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