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 시작을 알리는 사이렌이 공장에 울려퍼지면 열아홉 살 노동자의 혀도 컨베이어 벨트처럼 정확히 움직였다.

“형, 그동안 뭐하고 살았길래 그 나이 먹고 우리랑 일해요? 쪽팔리게.”

존대의 호칭을 붙여 모욕감을 높이는 효율적인 놀림. 미성년 노동자의 ‘선빵’에 내 말문은 막혔다. 컨베이어 벨트를 가운데 두고 마주 보며 작업하는 공고 3학년 현장실습생은 이런 효율을 어디서 배웠을까.

선제 공격이 통한 걸 눈으로 확인한 19세의 다른 노동자들도 협공을 시작했다. 내 좌우는 물론이고 대각에서 일하는 공고 실습생들의 놀림과 비아냥이 이어졌다. 속삭이는 듯이 작은 목소리로 말이다.

“그러게요. 형 정말 안 쪽팔려요?”
“내가 스물아홉 살이면 좀 폼 나게 살 거 같은데….”
형은 어쩌다가 열아홉 살이랑 똑같은 월급 받는 처지가 됐어요?

정말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구구절절 말하기 곤란했다. 나는 대충 둘러댔다. 대학을 다녔다는 걸, 공고생들에게 굳이 말하지 않았다. 노동운동에 투신한다는 식의 고상한 이유 따위도 없었다. 대학 졸업 후 한동안 진로를 정하지 못해 먹고살기 위해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할 뿐이었다.

모니터 공장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시절 ‘스물아홉 살’의 박상규. 왠지 얼굴에도 고됨이 묻어 있는 듯. ⓒ박상규

당시 한 라인에 약 50명의 노동자가 일했는데, 정규직 노동자는 10명 정도에 불과했다. 이들은 노란색 작업복을 입었다. 나머지는 모두 실습생 등 비정규직 노동자였는데, 우리는 검은색 작업복을 입었다. 전국에서 모인 직업계고 실습생이 절반이 넘었다.

옷 색깔로 구별되는 공장 내 계급, 여기에 잔뜩 나이만 먹은 듯한 나의 외모까지. 고교 실습생들의 놀림과 모욕은 사실 특별하지 않았다. 대개의 사람은 자신보다 약해 보이거나 만만한 존재에게 유·무형의 위해를 가하니까. 사회적 차별이란 그런 식으로 작동하니까.

컨베이어 벨트 옆에서 종일 선 채 날마다 약 3000개의 컴퓨터 모니터를 생산하는 일은 내 생애 가장 고된 노동이었다. 작업 시작 사이렌이 울리면 누군가 발 뒤꿈치에 작은 구멍을 내는 듯했고, 오후 6시께 마감 종이 울리면 피가 다 빠져 나간 것처럼 온몸이 축 처졌다. 저녁이 있는 삶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 고교생 노동자들에게도 피 말리는 노동에 대한 환멸은 다르지 않았다. 실습을 명목으로 전국에서 모였으나, 컨베이어 벨트를 타는 단순 노동에서 딱히 배우고 습득할 기술이란 건 없었다.

녀석들이 나와 자신들이 종일 하는 일을 “쪽팔리는 것” “폼 안 나는 것”으로 여긴 건 일견 자연스러웠다. 나는 ‘대졸자인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는 알량한 자만심으로 그 “쪽팔리는 일상”을 견뎠다. 2002년 그때, 나의 내면은 이런 생각이 가득했다.

나는 언제든 여길 뜰 수 있다. 이 공장에서 언제든 벗어날 수 있다.’

내 생애 첫 공고생들과의 인연은 20여 년 전 모니터 공장에서 시작됐다. 사진은 한 공고의 등교시간 풍경. ©셜록

얼마 뒤, 나는 정말로 공장을 떠났다. 기자가 돼 서울 광화문으로 출근했다. 나의 친애하는 실습생 노동자에게 작별 인사도 없이, 야반도주를 택한 채무자처럼 어디로 간다는 한마디 말도 없이 나는 공장을 도망쳤다.

그토록 나를 놀렸고, 나중엔 모든 모욕을 상쇄할 만큼 친하게 교감했던 직업계 고교 3학년 아이들에게 “난 사실 대학을 다녔다“는 말을 끝내 못했다. 그게 뭐라고, 나는 그 어린 동료들에게 끝까지 나의 이력을 솔직히 말하지 않았다. 내 생애 첫 공고생들과의 인연은 이렇게 끝났다.

마음까지 시원하게 정리되면 좋을 텐데, 그게 쉽지 않았다. 나의 내면엔 어린 동료들을 속였다는 미안함이 남았다. 공고 교복을 입은 학생이나 관련 뉴스를 보면 오래 전 기억이 다시 떠오르기도 했다.

그런 미련 때문일까. 도망치듯 공장을 떠난 뒤에도 공고와의 인연은 꽤나 길게 이어졌다. 오마이뉴스에서 일하던 2007년 나는 서울 성동구 ‘동호공고 폐교’ 사건을 기사로 썼다. 인근 아파트 주민들의 민원으로 벌어진 일이었고, 폐교의 정당성은 약했다.

보도 이후 동호공고 폐교는 없던 일이 됐다. 동호공고는 현재 ‘서울방송고등학교‘로 바뀌었다. 해당 기사는 기자 경력 중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보도다. 자만일 수 있으나 “그래도 학교 하나는 살렸다“는 마음이 들어서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을 설립한 이후에도 공고와의 인연은 이어졌다. 여성 교사에게 술시중을 강요하고, 교사 연애 금지 등 각종 사학비리로 몸살을 앓던 대구 영남공고 취재가 그것이다.(첫 기사 : <교사 10년 왕따.. 누구의 지시인가>)

영남공고 사학비리 취재 당시. 취재진을 피해 급히 자리를 뜨는 교장의 차. 그리고 박상규 기자를 뜯어내는(?) 학교 관계자들. ⓒ셜록

학교를 바로잡아달라고 제보를 준 교사 중 한 명이 바로 지한구 선생님이다. 2019년 그때 제보를 받고 나는 많이 망설였다. ‘서울도 특목고도 아닌 지방 사립 공업고등학교 문제를 보도한다고 누가 관심이라도 가질까….’ 이런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이 생각을 잘라낸 인물 역시 ‘공고 선생, 지한구‘였다. 그가 했던 말이 지금도 기억난다.

“지방 공고여서 보도가 망설여진다…. 기자님, 우리 학교 핵심 문제는 바로 그겁니다. 인문계나 외고, 자사고였다면 벌써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문제가 해결됐을 겁니다. 공고여서 수년째 문제가 이어지는 거고, ‘꼴통 학교‘라는 차별 때문에 관심이 없는 겁니다.

선생 지한구의 문제의식은 분명했다. 모두가 대한민국 학교를 회의하고 희망이 없다고 말할 때, 역설적이게도 공고 선생 지한구는 학교가 필요한 강력한 이유를 내게 말했다.

“부모 재력이 아이들 학력으로 이어지는 건 이제 뉴스도 아니잖아요! 그럼 공고엔 누가 오겠습니까?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옵니다. 그 아이들, 학교라도 없으면, 점심은 어디서 먹고 낮엔 뭐하고 지내겠어요. 그런 아이들일수록 학교에서 돌봐줘야 합니다. 우리 공고 역할이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 학교 좀 살려주십시오!”

이 무렵 지한구 선생님은 육아휴직 상태였다. 아이를 돌보는 와중에도 공고 애들 좀 살려보겠다고, 그들에게 좋은 학교를 만들어주고 싶다고, 지한구는 밤이면 밤마다 셜록 기자들과 미팅을 했다.

지한구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교사들의 노력 덕에 영남공고 비리 이사장은 구속됐고 학교는 정상화됐다.

지한구 선생님은 “학교만 자기 자리를 찾으면 공고생들을 잘 가르치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고 지켰다. 그가 진실탐사그룹 셜록 지면에 연재한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는 그가 약속을 지켜온 과정이자 증거다.(연재 첫 글 : <마지막 천원 양보하고 걸어서 등교… 이 학생 지키고 싶다>)

지한구 선생님의 연재 글이 단행본 <공고 선생, 지한구>로 출간됐다 ⓒ셜록

연재 글을 모아서 낸 책 <공고 선생, 지한구>(후마니타스)는 ‘셜록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앞의 두 책 <지연된 정의> <거래된 정의>는 셜록의 내부 요원들이 썼다면, 이번 <공고 선생, 지한구>는 셜록의 친구 왓슨(정기유료독자)의 작품이어서 의미가 크다. 지한구는 셜록의 오랜 왓슨이다.

2002년 나와 함께 컨베이어 벨트를 타던 그 공고생들은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공고 선생, 지한구>를 펼치면 그때의 기억이 컨베이어 벨트처럼 내 눈앞에 차곡차곡 펼쳐진다. 내게 큰 모욕감을 줬던 그 친구들이 이제는 그립다. 이제 그들도 40대가 됐을 텐데, 나이 많다고 놀렸던 나를 가끔 생각할까?

[북토크] 공고 선생 지한구의 ‘특별한 수업’에 초대합니다

2025년 12월 3일 오후 7시 30분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 ‘모이다’ 홀 (서울 용산구 백범로99길 40 용산베르디움프렌즈 101동 지하1층)

참가비 : 왓슨(셜록의 정기유료독자) 무료 / 일반 독자 1만 원

☞ 구글 폼으로 참가신청 하기

박상규 기자 comune@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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